최원식
1. 한국 근대문학과 식민지 체험
격동의 20세기가 요동 속에 저물고 있다. 러시아 혁명(1917)과 함께 일찍이 요괴로 떠돌던 공산주의가 하나의 거대한 국가적 실체로 현현된 이후 격렬한 이념적 갈등으로 점철된 20세기의 드라마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기점으로 폭발한 동구 혁명의 물결 속에 ‘사멸하는 자본주의’를 혁명할 ‘사회주의’가 오히려 혁명의 대상으로 전락함으로써 약간은 희극적으로 일단락되었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의 공포로부터 해방된 자본주의는 ‘태평천하’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20세기의 황혼에 세계는 다시 천박한 낙관주의의 가면 속에서 밑 모를 불안으로 속절없이 빨려들고 있다. 터보 엔진을 단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진군 아래 아시아발(發) 금융 위기가 자본주의의 태평성대에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이제는, 브레이크를 떼어낸 자본이 오히려 요괴의 자태를 뚜렷이 하면서 ‘자본주의=역사의 종말’을 위협하는 묘한 형국이다.
이 기막힌 20세기를 온몸으로 피흘리며 통과해온 한반도, 우리에게 20세기란 무엇인가? 아시아에 당도한 서구 자본의 위협 앞에 그 첨병으로 변신하여 오히려 군국주의가 조숙했던 일제의 침략으로 가혹한 식민지로서 굴욕의 세월을 보낸 20세기 전반기의 한반도는, 그 후반기에는 전후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의 한 거점으로서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종속되었다. 물론 북한은 겉보기에는 남한과 달리 미국의 영향력 바깥에 있는 것 같지만, 그 격렬한 반미적 태도 또한 남한 정부의 전통적 친미와 거리가 그렇게 먼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20세기 후반기의 한반도에서 미국의 존재는 가장 강력한 상수(常數)의 하나였다.
그런데 20세기 한반도의 역사에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일본과 미국의 현전(現前)이 오로지 부정적 지배자의 역할만으로 고정되지 않았다는 점이야말로 골칫거리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본과 미국이 때로는 협동하고 또 때로는 갈등하는 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점을 예리하게 분간하면서, 그들의 지배적 힘에 대응하는 우리의 시각도 이중적이었던 점을 간파해야 한다. 이는 친일파 또는 친미파의 시각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강경한 반일·반미파의 사상 이면에도 저항의 대상으로 되는 나라에 대한 따라잡기의 열망이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일본과 미국은 저항의 대상인 동시에 후진적 한반도 사회의 미래를 내장한 일종의 선취(先取)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20세기 한국문학은 근대에 대한 이중의 긴장 속에서 고투하였다. 근대성을 성취하려는 앨 쓴 노고와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더욱 긴절한 수고 사이에서 무한히 분열하면서, 일본 및 서구 근대문학에 대한 유혹과 길항(拮抗)을 거듭하면서 20세기 한국문학은 어둠 속의 낮은 포복을 멈추지 못하였던 것이다. 김수영(金洙暎)의 탄식이 더욱 절실하다.
우리들의 敵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敵은 카크 다글라스나 리챠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惡漢이 아니다
그들은 善良하기까지도 하다
(……)
우리들의 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戰線은 당게르크도 놀만디도 延禧高地도 아니다
(……)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있다
民主主義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民·主·主·義·式·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民主主義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그림자가 없다
―「하……그림자가 없다」 중에서
20세기 한국문학의 이 독특한 싸움 속에서 이 싸움의 독특성을 제대로 알아채고 제대로 싸웠던 뛰어난 문학가들의 최량의 작품들은 그래서 일본 및 서구문학과는 스스로 구별되는 독특한 자질을 하나의 전통으로 삼아왔던 바이다.
2. 이상(李箱)을 보는 눈
이상(1910~1937)은 과연 이 독특한 싸움의 스펙트럼, 어디쯤 위치한 작가였던가?
김문집(金文輯)은 일찍이 「날개」(1936)를 논하면서, “이 정도의 작품은 지금으로부터 7, 8년 전 신심리주의의 문학이 극성한 동경 문단의 신인작단에 있어서는 여름의 맥고(麥藁)모자와 같이 흔했다”1)고 호언했지만, 과연 그럴까? 물론 이상의 형식 실험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닐 터이지만, 과격한 실험의 바닥을 받치고 있는 어떤 진정성에 비추어볼 때 당대의 일본문학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다. 김문집의 발언은 위악적인 허튼말이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상에 대한 김문집의 조롱이 그의 요절로 막 강화되기 시작한 이상의 신화화에 저항하는 일종의 진정제 역할도 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예나 이제나 이상 문학의 실상은 호들갑스런 풍문 속에 실종되곤 했던 것이다.
또한 김문집의 이상 비판은 최재서(崔載瑞)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최재서는 이상을 본격적으로 평가한 첫 비평가다. 그는 박태원(朴泰遠)의 『천변풍경(川邊風景)』(1936)과 이상의 「날개」가 발표되자마자, 두 작품의 의의를 간파하고, “객관적 태도로써 객관을 보았”던 전자를 ‘리얼리즘의 확대’로, “객관적 태도로써 주관을 보았”던 후자를 ‘리얼리즘의 심화’로 파악함으로써, 자연주의 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부터 한국문학의 탈각을 명토 박고자 하였다.2) 그럼에도 그가 모더니즘 대신 굳이 이 궁색한 용어를 창안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 진정석(陳正石)은 “당대 현실에 대한 문학적 응전을 위해 모더니즘을 수용할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리얼리즘에 대한 지향성을 포기할 수 없었던 한 리얼리즘론자의 딜레마”로 해석하고 있다.3) 흥미로운 견해다. 그러나 과연 최재서가 리얼리스트였던가? 이 점에 관해서는 의문이다. 자연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는 리얼리즘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그는 모더니스트에 가깝다. ‘리얼리즘의 확대 또는 심화’란 용어는 이 점에서 리얼리즘의 이름 아래 리얼리즘을 폐기하고자 하는 고도의 전술적 선택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끝내 모더니즘이란 용어 선택을 왜 기피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가 모더니즘에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는 실제로 『천변풍경』과 「날개」의 의의를 긍정하면서도, 전자에 대해서는 ‘밀봉된 세계’의 사회적 연관 의식의 부족을, 후자에 대해서는 ‘생활 자체의 리듬’으로부터 격리된 모랄의 부재를 날카롭게 비판했던 것이다. 이러한 비판의 이면에는, 이미 낡은 자연주의 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부터 한국문학의 탈각을 부추기면서도, 정작 실물로 나타난 한국 모더니즘, 특히 요란하기 짝이 없는 풍문을 몰고 다닌 이상의 예술에 대한 일말의 의심, “그저 독자의 호기심을 끌기 위한 단순한 손작란”이 아닌가 의문도 없지 않았다. 「고(故) 이상의 예술」(1937년 5월 15일 이상 추도회에서 행한 최재서의 강연)에는 그가 이상의 문학을 진품으로 인증하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김기림(金起林)의 『기상도(氣象圖)』(1936) 출판 기념회에서 이상을 직접 대면, 대화를 나누곤 그는 기쁘게 안심한다.
결국 이상이 실험적인 테크니크로써 기괴한 인물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유희거나 불순한 인기책이 아니라 그의 고도로 발달한 지적 생활에서 솟아나는 필연의 소산이었다는 것, 따라서 그의 예술적 실험은 그의 기맥힌 생활이 갖추고 나설 표현 형식을 탐구하는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나는 안심하고 결론할 수 있었읍니다.4)
그가 누누이 강조하는 ‘생활’은 리얼리즘이 추구하는 ‘현실’의 대체일 터인데, 그것은 30년대 문학이 발견한 ‘일상성’과 기맥을 통한다. 아마도 20세기 서구문학, 특히 모더니즘에 대한 가장 예민한 관찰자였던 그는 ‘현실’의 악령에 지핀 당대 한국문학을 코드 전환하려는 원망 속에 김기림, 박태원, 이상 등 모더니스트의 문학에 개입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안심은 한국 모더니즘에 대한 감정(鑑定)의 기준이 기실 서구 모더니즘에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그는 서구 모더니즘의 한계도 잘 알고 있었다.
모더니스트의 시는 사회의 일부 특수 계층―교양이 있고 문학적 흥미의 추구에 종사하는 특권 계급―에 호소한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계급’시다. 그것은 시인이 발명한 독특한 언어로써 시인 자신의 개인적 공상을 표현하려는 것인데, 아마도 예술에 있어서의 개인주의 전통의 최후 단계를 표시하는 것이리라.5)
그럼에도 모더니즘의 분열을 비사회주의의 길에서 극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의 딜레마는 리얼리스트보다는 모더니스트의 그것에 가깝다. 그의 딜레마에는 식민지 현실이 거의 매개되고 있지 않은데,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거의 실종된 채 전개된 최재서 모더니즘의 딜레마가 마침내 파시즘에의 투항으로 귀결되고 말았던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최재서에 대한 본격적 반론은 임화(林和)에 의해 제기된다. 그 역시 최재서가 주목한 30년대 소설의 두 개의 새로운 경향에 유의함으로써 최재서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 현상에 대한 해석은 최재서와 대비된다. 그는 최재서의 ‘리얼리즘의 심화’와 ‘확대’를 각각 ‘내성(內省)의 소설’과 ‘세태 소설’로 명명함으로써, 두 경향의 동시 출현이 “말할랴는 것과 그릴랴는 것과의 분열”이라는 공통의 기반에 뿌리를 둔다는 점을 간파한다. 또한 두 경향이 이상과 박태원뿐 아니라 카프계(係) 작가로까지 번졌다는 점에 유의하면서, 내성으로 나아간 김남천(金南天)과 세태로 나아간 채만식(蔡萬植)을 그 대표적 예로 들고 있다. 요컨대 그는 주관과 객관의 속절없는 분열로 빠져드는 30년대 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일종의 병적 징후로 파악했던 것이다.6)
그럼에도 그가 이 분열을 카프 시대처럼 올림포스적 위치에서 질타하지 않는 점이 흥미롭다. 모더니즘의 출현을 반기면서도 미심쩍은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최재서와 달리 그는 이 경향의 대두에 우려하면서도 시대적 질곡 속에 이런 모양새로 나올 수밖에 없는 30년대 한국문학의 질고를 함께 앓는 것이다. 임화는 뜻밖에도 이상을 옹호한다.
어떤 이는 이상을 뽀오드렐(보들레르―필자)과 같이, 자기 분열의 향락이라든가 자기 무능의 실현이라 생각하나, 그것은 표면의 이유다.
그들도 역시 제 무력, 제 상극을 이길 어떤 길을 찾을려고 수색하고 고통한 사람들이다.7)
임화의 동병상련(同病相憐)! 대공황(1929)이 세계 혁명의 폭발이 아니라 파시즘의 진군으로 귀결되면서 한치 한치 세계대전을 향해 준동해가는 30년대 종반, 그 우울한 행진 속에서도 사멸의 공포를 뚫고 부활한 자본의 새로운 공세에 식민지 도시는 연옥의 매혹적 자태로 인간들을 꼬이고 있으니, 진정한 문학의 길은 과연 어디로 나 있는 것인가?
나는 임화의 동병상련을 이상론(論)의 출발점으로 삼고 싶다.
3. 동경에서 서울을 다시 보다
나는 최근 이상이 동경에서 유서처럼 남긴 단편 「실화」8)(1939)를 깊은 흥미 속에 다시 보았다. 그가 문득 동경으로 건너간 것은 1936년 가을, 이듬해 2월 중순 엉뚱하게도 사상 혐의로 일본 경찰에 피체, 건강 악화로 3월 중순에 보석되었으나, 그 후유증으로 4월 17일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만 26년 7개월로 영면했으니, 그가 동경에 머문 기간은 고작 반 년이 못 된다. 그의 최초이자 마지막 동경 여행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모두 9장으로 이루어진 이 짤막한 단편은 이상류(流)의 경구로 시작된다.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단 한 문장으로 구성된 1장의 이 경구는 일종의 주제음처럼 4장에서 두 번―한 번은 그대로, 또 한 번은 변형된 형태로 등장하는데, 다시 작품의 끝을 약간 변조(變調)된 이 경구로 마무리한다. 말하자면 이 경구는 이 단편 해석의 관건을 쥔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주목할 것은 이 작품의 제목 ‘실화’다. 꽃의 이미지는 3장의 끝에 처음 등장하여 4, 5, 6, 7장 곳곳에 출몰하는데, 마지막 장을 장식함으로써 이 또한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또하나의 화두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실화」의 구성은 단순하다. 간다구(神田區) 짐보오초오(神保町), 동경 유학생 C양의 방에서 시작하여(2, 4장), 신주쿠(新宿)의 카페를 거쳐(6, 8장), 짐보오초오 스즈란도오(鈴蘭洞)의 ‘나’의 방으로 돌아오기 위해 신주쿠 역 폼에서 비칠거리는 데서(9장) 마무리되는 것이 기본 동선(動線)이다. 작가는 이 노정의 사이사이(3, 5, 7장)에 서울 장면들을 끼워넣는다. 그런데 동경 장면들에서도 ‘나’는 계속 서울을 반추하고 있으니, ‘나’는 몸은 동경에 있되 의식은 서울에 지펴 있는 셈이다. 식민지 모국의 수도 동경에서 식민지 수도 서울을 반추하는 것, 말하자면 동경은 서울의 거울이다. 앞에서 지적한 경구와 꽃과 함께 서울 또한 이 작품 해석의 근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 개의 수수께끼를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산보해보자.
2장의 무대는 유학생 C양의 방이다. “여기는 東京 (……) 神田區 神保町”9) 또한 작중화자는 친절하게도 이 장면이 12월 23일의 일임을 괄호로 가르쳐준다. 때는 저녁 무렵,10) 그녀의 방을 방문한 ‘나’는 한없이 재깔거리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녀는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어느 영어 소설, 한 청년과 사랑에 빠진 여성이 유서를 쓰고 죽어가는 줄거리를 종작없는 자신의 논평을 붙여 종알거린다. “죽기는 왜 죽어” 했다가, “저도 그런 연애를 해보고 싶어요”를 거쳐, “선생님, 이 여자를 좋아하십니까?좋아하시지요좋아요아름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해요그렇게까지 사랑을 받은남자는 행복되지오네선생님선생님 선생님”에 이르면, 억제된 듯 발산하는 그녀의 에로티시즘이 제법 농익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한마디 대꾸 없이 딴청한다. 그렇다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는 졸았나? 아니 나는 스토리를 다 외운다”고 했듯이 다른 생각에 골몰하면서도 비몽사몽간에 들려오는 그녀의 이야기, 즉 하나의 청각적 기호로 환원된 그녀의 음성의 흐름에 그의 귀는 열려 있는 것이다. 앞 문단 끝에 인용된 예에서 보듯이 그녀의 대사 부분에 단속적으로 출현하는 “”표들은 바로 이 기묘한 듣기/들려오기의 상태를 절묘하게 베낀 이상의 탁발한 창안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녀의 이야기 장면 중간중간에 삽입된 ‘나’의 발화(發話)되지 않은 독백은 괄호 속에 격리 처리되는데, 이 괄호들은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는 단절을 즉물적으로 표상한다. 그런데 그의 발화되지 않은 독백이 그녀의 이야기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가령 그녀가 “이 청년은 요 세상에서 담배를 제일 좋아합니다”라고 하면, 그는 생각한다, “나야말로 동경 와서 쓸데없이 담배만 늘었지. 울화가 푹 치밀 때 저 폐까지 쭉 연기나 들이켜지 않고 이 발광할 것 같은 심정을 억제하는 도리가 없다”고. 그녀의 대사와 그에 의해 촉발된 그의 독백들을 의식의 흐름으로 교직하고 있는 2장은 우리 소설사에서 가장 빛나는 형식 실험의 압권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하여 대화가 진행될수록 둘 사이의 소통 불가능성은 더욱 강화되고 있으니, 그녀는 그녀대로 자기 최면 속에 신파조로 유폐되고, 그는 그대로 자기 생각에 골몰하고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
아, 참 고운 목소리도 다 있지. 10리나 먼 밖에서 들려오는 값비싼 시계 소리처럼 부드럽고 정확하게 윤기 있고피아니시모꿈인가. (……) 그 흐르는 듯한 연연한 목소리가 내 감관을 얼싸안고 목소리가 잤다.
이는 관음증(觀淫症)의 전도된 표현인 일종의 청음증(聽淫症)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그녀에게도 청음증적 경향이 드러난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 남자의 성격이 참 좋아요담배도 좋고 목소리도 좋고이 소설을 읽으면 그 남자의 음성이 꼭 웅얼웅얼 들려오는 것 같아요.” 여기서 ‘그 남자’는 물론 소설 속의 남자다. 그녀는 소설 속의 여자가 되어 자신의 무의식을 연기한다. 의식의 차원에서는 은폐되고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노출된 두 남녀의 성애적 분위기는 일종의 외설이다. 그래서 동경의 세밑, 여자 유학생의 방에서 벌어지는 이 조용한 소극(笑劇)은 무슨 연옥의 풍경처럼 신산하다.
그는 왜 이 황폐한 풍경 속으로 한없이 침몰하는가? 앞에 인용한 첫번째 괄호에서 보듯이, 그는 동경에서 깊은 울화에 빠져 있다. 그 속내의 일단이 둘째 괄호에 나타난다. 그것은 연(姸)이의 간통에 말미암는다.
나는 일찍이 어리석었더니라. 모르고 연이와 죽기를 약속했더니라. 죽도록 사랑했건만 면회가 끝난 뒤 대략 20분이나 30분만 지나면 연이는 내가 ‘설마’ 하고만 여기던 S의 품안에 있었다.
그는 연이와의 찬란한 정사를 꿈꾸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문명의 확산 과정은 자살의 폭증을 초래했다. 자기 보존의 최고 낙원의 실현을 공언했던 자본주의가 오히려 자기 파괴적 경향으로 치닫게 된 것은 큰 반어가 아닐 수 없다. 자살의 증가는 나아가서 ‘아름다운 죽음’의 예찬으로 격화되면서 이제 자살은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 역병의 하나로 악화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적나라한 제휴인 정사는 그 최고의 표현이다. 자살, 그것도 정사를 통해서, 그를 결행하는 사람의 개인성은 불멸의 위치로 승화되는 것이니, 이야말로 현대의 묵시록이다. 그런데 죽음을 통한 개인성의 역설적 실현에 대한 ‘나’의 꿈을 연이가 일거에 유예시켰다. ‘나’를 울화에 빠뜨린 진정한 원인은 연이의 간통이라기보다 그녀가 정사의 약속을 배반한 데 있을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연이는 타나토스의 충동을 실현하려는 그의 쾌락원칙에 근본적 제동을 가하는 현실원칙 또는 초자아다. 그리하여 셋째 괄호에서 ‘아름다운 죽음’을 꿈꾸는 C양에게 그는 속으로 외친다. “그러나 철부지 C양이여. 연이는 약속한 지 두 주일 되는 날 죽지 말고 우리 살자고 그럽디다. 속았다. (……) 나는 어리석게도 살 수 있을 것을 믿었지.” 연이는 ‘나’의 자살 충동을 제어하는 초자아인 동시에 자신의 쾌락원칙에 거침없이 몸을 맡기는 에로스이기도 하다. 요컨대 그녀는 욕망의 해방과 그 금기를 아우른 근대성 그 자체의 기호인 것이다.
3장의 무대는 서울. 작중화자는 또 친절하게 때를 알려준다, “10월 23일부터 10월 24일까지”라고. 그런데 장과 장 사이의 연결도 아주 흥미롭다. 3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파이프에 불이 붙으면?
끄면 그만이지. 그러나 S는 껄껄아니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타이른다.
이 인상적인 시작은 2장의 끝 장면, 즉 그녀의 다음과 같은 낮은 외침과 맞닿아 있다. “선생님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네담배가 다 탔는데아이파이프에 불이 붙으면 어떻게 합니까눈을 좀뜨세요.” 작가는 영화의 수법, 몽타주를 훌륭하게 활용하였다. 이 교묘한 매개를 통해 현재와 과거, 동경과 서울은 비동시적 동시성의 고리 속에 하나로 묶인다.
3장은 연이의 간통과 관련된 두 장면으로 구성된다.
첫 장면은 ‘나’와 S의 실랑이를 그려낸다. 두 친구의 가시 돋친 설전 속에서 연이가 “일찍이 S의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결혼 이후에도 S와 “한 번 이상” 곧 수시로 통정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상! 자네 「EPIGRAM」이라는 글 내 읽었지”라는 S의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EPIGRAM」은 이상이 도동(渡東)하기 직전 1936년 8월에 『여성』에 발표한 수필이다. 여기서 이 작품이 텍스트 안에서뿐 아니라,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서도 무시로 소통하고 있는 점이 뚜렷해진다. 또한 작가는 이 작품에서는 아주 내놓고 작중화자 ‘나’가 곧 작가 이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으니(이 사실은 이미 2장에서 C양의 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밝혀진 바 있다), 텍스트의 안과 밖도 거의 경계가 지워진 셈이다.
그럼 작품 속의 S가 읽은 이 수필은 어떤 글인가? ‘임(姙)이’라는 여성을 놓고 벌이는 ‘나’와 ‘그 친구’의 대화로 구성된 이 글에서 ‘그 친구’의 입을 통해 그녀의 남성 편력이 공개된다. 그녀의 첫 남자는 이(李)라는 것, 두번째 남자가 ‘그 친구’인데 “꼭 한 번” 통정했다는 것, 그러니까 ‘나’는 그녀의 세번째 남자라는 것. 이로 미루건대 임이는 연이이고 ‘그 친구’는 S고 ‘나’는 이상으로 대입되는 것이다. 이 기묘한 수필은 마치 이상의 소설 한 토막을 떼어낸 것 같다. 텍스트의 안과 밖 사이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수필 장르의 성격에서 볼 때 이 수필은 수필이라기보다 일종의 소설적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두 친구의 대화를 ‘회화(會話)’라고 냉소적으로 지칭한 데서도 이 수필의 소설적 의장이 드러나는데, 「EPIGRAM」은 단편 「실화」에 깊이 참여한다. 이 수필을 읽은 S가 이 단편에서 그녀와의 관계가 한 번 이상이라고 밝힌 점뿐만 아니라, 이 수필의 제목이나 부제 ‘아무도 모를 내 비밀’이 이 단편의 주제와 긴밀히 연관되고 있는 점은 더욱 그렇다. 비밀 또는 진실을 끝없이 공개함으로써 가난해지는 글쟁이 ‘나’에 대해서 진실을 드러내는 듯 은폐하는 그녀와 S는 여전히 비밀이 많은, 침투 불가능한 세계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일까?
3장의 둘째 장면은 10월 23일 밤 10시부터 24일 새벽까지 이어지는 그녀에 대한 ‘나’의 심문 기록이다. 비밀에 싸인 그녀의 진실에 다가서려는 헛된 노력 끝에 그는 자살을 생각하며 외출 준비를 마치고 그녀와 동거하던 황량한 방을 둘러본다. “이 방에는 가을이 이렇게 짙었건만 국화 한 송이 장식이 없다.”
국화를 매개로 4장, 다시 C양의 방(이 방에는 “국화 두 송이가 참 싱싱하다”)으로 장면 전환한다. 4장에서 C양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추가된다. “이 방에는 C군과 C양이 산다. 나는 C양더러 ‘부인’이라고 그랬더니 C양은 성을 냈다. 그러나 C군에게 물어보면 C양은 ‘아내’란다.” 그리고 2장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던 C군이 “조선 곰방대를 피우고” 이 장면에 죽 동참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드러나면서, 이 방 풍경의 기묘성은 더욱 강화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C군과 동거하며 아침이면 학교에 나가 천연덕스럽게 여학생 노릇을 하는 C양도 연이처럼 비밀이 많은 소녀일지 모른다고 의심하면서 ‘나’는, ‘나’의 애인이요 S의 정부요 K교수의 제자로서 존재의 다층성을 능란하게 연기하는 연이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연이는 N빌딩에서 나오기 전에 WC라는 데를 잠깐 들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오면 남대문통 십오간 대로 GO STOP의 인파.
“여보시오 여보시오, 이 연이가 조 이층 바른편에서부터 둘째 S씨의 사무실 안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나왔는지 알아맞히면 용하지.”
그때에도 연이의 살결에서는 능금과 같은 신선한 생광(生光)이 나는 법이다. 그러나 불쌍한 이상 선생님에게는 이 복잡한 교통을 향하여 빈정거릴 아무런 비밀의 재료도 없으니 내가 재산 없는 것보다도 더 가난하고 싱겁다.
이 대목에서 우선 주목할 것은 ‘GO STOP의 인파’다. 남대문통을 가득 메운 익명의 군중은 신호등의 명령에 순응한다. 영어 대문자로 강조된 금지와 허용의 이 기호는 근대성 일반에 관계되는 동시에 식민지 근대성 즉 일제의 지배 체제와 직결되는 것인데, 식민지 군중을 훈육하는 신호등 앞에서 연이는 능금 같은 빛을 발한다. 비밀을 간직한 채 현대 도시의 익명성 속으로 즐거이 자맥질하는 그녀는 매혹인 동시에 저주인 도시의 마성(魔性),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에게 거리는 공포다. 이 점에서 이상의 모더니즘은, 그 필명 ‘상(箱)’이 가리키듯, ‘거리의 모더니즘’이 아니라 불쌍한 ‘골방의 모더니즘’이다. 금기의 촘촘한 그물망에 포획된 식민지 서울의 거리는 창조적 역동의 가능성이 원천봉쇄된 거리이기 때문이다.
더욱 딱한 것은 골방도 안식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상이 김기림에게 보낸 사신(私信)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전원도 우리들의 병원이 아니라고 형은 그랬지만 바다가 또한 우리들의 약국이 아닙디다.”11) 전원과 바다 사이에서 그러했듯, 이상은 골방과 거리, 두 지점 사이를 부단히 왕복 운동한다. 이상 모더니즘의 진정한 위기는 거리의 위기와 골방의 위기가 항시 병발(竝發)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C양이 준 흰 국화를 꽂고 그녀의 방을 나오면서 5장은 다시 3장, 연이와 동거하던 서울의 방 장면으로 전환한다. 그는 연이와의 동거가 종말에 이르렀다는 생각 속에 방을 나오는데, 어디로 가냐는 연이의 질문에 얼결에 동경이라고 대답하곤, 교외를 배회하며 부질없이 자살 장소를 헤아려보기도 하지만, 해가 저물자 시내로 들어온다. “시내사람들은 여전히 그 알아볼 수 없는 낯짝들을 쳐들고 와글와글 야단이다.” 방의 위기와 함께 거리로 내몰리면서 그의 반속주의(反俗主義)가 더욱 강화된 셈인데, 이는 「날개」의 인상적인 끝 장면, 미츠코시(三越:지금 명동 입구의 신세계백화점) 옥상에서 정오 사이렌이 울릴 때의 도시의 마법 같은 역동성을 포착한 장면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싸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이상의 소설 속에서는 드물게 만개한 이 발랄성은 금홍이와의 음습한 골방 생활을 청산하고 거리의 사회성을 향해 날개를 폈던 충일했던 시점의 작가의 의욕을 표상하는 것이다. 이상 모더니즘은 이 지점에 이르러 거의 리얼리즘에 육박하는 것이다. 「날개」의 주인공이 “날개야 다시 돋아라./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라고 외치는 장면은, 청춘의 마지막 눈물과 함께 고리오 영감을 묻은 라스티냐크가 축축이 젖은 황혼 속에 하나 둘 등불을 켜는 파리를 내려다보며 “이제 우리 둘의 대결이다”라고 외치며 씩씩하게 시내를 향해 내려가는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끝 장면을 방불케 할 만큼 힘차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화」에서 이상의 날개는 꺾였다. 미츠코시 옥상에서 잠깐 엿보았던 식민지 수도의 역동성은 환시(幻視)였던가? 그렇다. 특히 30년대의 식민지 거리는 애초에 군중의 역동성이 봉쇄된 곳인 것을! 결국 이상의 동경행은 날개 잃은 식민지 모더니즘의 마지막 비상구였던 것이다.
5장에서 ‘나’가 연이와 동거하던 방을 나와 거리로 나오듯이, 6장에는 C양의 방을 나와(4장)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도정의 한 지점, 섣달 대목의 신보정 영란동, 동경의 거리가 처음 나타난다. 그는 여기서 인상적인 거리 풍경 하나에 부딪친다.
진따(옛날 활동사진 상설관에서 사용하던 취주 악대―필자)진동야의 진따가 슬프다.
진따는 전원 네 사람으로 조직되었다. 대목의 한몫을 보랴는 소(小)백화점의 번영을 위하여 이 네 사람은 클라리넷과 코넷과 북과 소고를 가지고 선조 유신(維新) 당초에 부르던 유행가를 연주한다. 그것은 슬프다 못해 기가 막히는 가각풍경이다. 왜? 이 네 사람이 다 묘령의 여성들이더니라. 그들은 똑같이 진홍색 군복과 군모와 ‘꼬꾸마’(군졸 군모에 다는 붉은 깃털―필자)를 장식하였더니라.
어느 백화점의 선전을 위해 네 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취주 악대, 그것도 유신 초기 유행가를 연주하는 이 광고 악대의 출현 앞에서 ‘나’는 “슬프다 못해 기가 막히”다. 왜 그런가? 우리는 먼저 이 악대의 군사적 기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따는 아마도 ‘친다이(鎭台)’에서 유래했을 터인데, 그것은 메이지(明治) 초기 각지에 두었던 군대, 우리로 치면 구한국 시대 진위대(鎭衛隊)에 해당할 것이다. 친다이 군악대의 상업화가 말하자면 진동야의 진따인 셈이다. 그러니 붉은 군복을 입고 낡은 유행가를 부르며 백화점을 선전하는 이 여성 악대는 일본 자본주의의 군사적 성격을 상징하는 것인데, 또한 천황제 파시즘 아래 전쟁으로 치닫고 있던 1930년대 일본 사회의 한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나’의 동경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짐작하게 된다.
이 점을 이상이 동경 시절에 남긴 수필과 편지를 통해 조금 보충해보자. 김기림에게 보낸 이상의 편지들(『여성』 1936년 11월호)에는 온통 동경에 대한 야유로 가득하다. “기어코 동경 왔오. 와보니 실망이오. 실로 동경이라는 데는 치사스런 데로구료.”(「사신」 6) 동경에 대한 그의 구역질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표피적인 서구적 악취의 말하자면 그나마도 그저 분자식(分子式)이 겨우 여기 수입이 되어서 ‘혼모노’(진짜―필자) 행세를 하는 꼴”(「사신」 7), 즉 동경이 서구 근대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이상의 미술에 대한 조예가 수준급이란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거니와, 일본 미술에 대한 평가도 흥미롭다. “제전(帝展)12)도 보았오. 환멸이라기에는 너무나 참담한 일장의 난센스입디다. 나는 그 뼁끼의 악취에 질식할 것 같아 그만 코를 쥐고 뛰어나왔오.”(「사신」 7) 이 지독한 야유는 우리 문인들의 동경에 대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선망에 비길 때 매우 예외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13)
이상의 동경 비판은 그의 서구주의에서 말미암는 것일까? 과연 그는 동경에 대한 환멸 속에서 서구를 생각한다. 이 소설 6장 앞머리, 진따를 구경하기 직전에 ‘나’는 영란동의 고본야시에서 “최후의 20전을 던져 타임스판 상용 영어 4천자라는 서적을 샀다”. 그리고 진따의 희극을 관람한 뒤 안개 낀 영란동 거리를 바라보며 독백한다. “영경(英京:영국의 서울―필자) 윤돈(倫敦:런던―필자)이 이렇다지?”14) 그는 나아가 뉴욕을 생각한다. 이 거리에서 Y군을 만나 엠프레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ADVENTURE IN MANHATTAN에서 진아더가 커피 한 잔을 맛있게 먹더라. (……) 그러나 나는 조엘 마크리만큼은 맛있게 먹을 수 있었으니”라고 되뇐다. 일명 ‘MANHATTAN MADNESS’로도 통하는 〈맨해튼의 모험〉은 미국의 흑백 영화다. 뉴욕의 심장부, 아니 세계 자본주의의 메카, 맨해튼에서 벌어지는 지능적인 은행털이를 다룬 이 코미디 영화가 제작된 것이 1936년이니, 이상은 아마도 동경에서 바로 이 영화를 본 모양이다. ‘진아더’는 이 영화의 여주인공을 맡았던 진 아서(Jean Arthur)요, ‘조엘 마크리’는 예술품 도둑을 추적하는 그 남주인공, 예술 감식가이자 범죄학자 역을 한 조엘 매크리(Joel Mccrea)다. ‘나’는 동경의 다방 ‘엠프레스(황후)’에서 『상용 영어 4천자』를 끼고 모차르트를 들으며 진 아서 또는 조엘 매크리처럼 커피를 마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실화」에 영화적 기법이 능숙하게 이용된 점은 앞에서 지적했거니와, 이상도 서양 영화를 즐겨 본 것 같다. 특히 프랑스 감독 르네 클레르(Ren? Clair)에 주목했다. 이상은 르네 클레르의 〈최후의 억만장자Le dernier milliardaire〉(1934)를 보고, “일본이 그렇게 되어가는 꼴이 깨가 쏟아지도록 재미있다고 손뼉까지 치면서 유쾌해했다.”15) 카시나리오(Casinario)라는 가상 국가의 독재자 방코(Banco)의 광기를 통해 당시 흥기하는 유럽 파시즘을 풍자하고 있는 이 영화에 환호했던 이상은 결코 순진한 서구주의자는 아닌 것이다. 과연 그가 런던 또는 파리 또는 뉴욕에 갔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실제로, 동경에 실망한 그는 “뉴육(紐育:뉴욕―필자) 브로드웨이에 가서도 나는 똑같은 환멸을 당할는지”16) 하고 자문한 바 있는데, 아마 그는 거기서도 역시 실망하리라. 왜? 그는 뜻밖에도 동경에서 오히려 서울을 예찬하기 때문이다. “예다 대면 경성이란 얼마나 인심 좋고 살기 좋은 ‘한적한 농촌’인지 모르겠습디다.”(「사신」 7) 이상의 촌티는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을 일본 또는 서구 모더니즘과 분할하는 중요한 지표의 하나인데, 그렇다고 그가 촌티를 무조건 찬양했던 것은 아니다. “20세기를 유지하노라고 야단들인” 동경에서, 그는 “19세기 쉬적지근한 내음새가 썩 많이 나는 내 도덕성”(「동경」)을 확인하고, “19세기와 20세기 틈사구니에 끼여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사신」 7)에 지나지 않음을 통각(痛覺)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은 동경에서 뉴욕으로 외파(外破)되기보다는 동경에서 서울로 수렴되었으니, 요컨대 이상은 동경에서 자신의 모더니즘의 식민지적 조건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4. 최후의 보헤미안
이는 엠프레스를 나와 Y군과 함께 신주쿠(新宿)의 노바(NOVA)에 갔을 때 정지용(鄭芝溶)의 「카ㅇ페 스란스」(1926)를 패러디하는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마담은 루파시카. 노바는 에스페란토. 헌팅을 얹인 놈의 심장을 아까부터 벌레가 연해 파먹어들어간다. 그렇다면 시인 지용이어! 이상은 물론 자작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겠읍니다그려!
‘루파시카’는 루바쉬카(rubashka), 곧 러시아식 남자 윗저고리고, ‘헌팅’은 도리우치(鳥打帽)일 터인데,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패러디의 대상인 「카ㅇ페 스란스」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옴겨다 심은 棕櫚나무 밑에
빗두루 슨 장명등,
카ㅇ페 스란스에 가쟈.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뻣적 마른 놈이 압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 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늙이는 불빛
카ㅇ페 스란스에 가쟈.
이 놈의 머리는 빗두른 능금
또 한놈의 心臟은 벌레 먹은 薔薇
제비 처럼 젖은 놈이 뛰여 간다.
*
『오오 패롤(鸚鵡) 서방! 꾹 이브닝!』
『꿋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鬱金香 아가씨는 이밤에도
更紗 커틴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子爵의 아들도 아모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히여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大理石 테이블에 닷는 내뺌이 슬프구나!
오오, 異國種강아지야
내발을 빨어다오.
내발을 빨어다오.
아마도 시인이 당시 유학하고 있었던 경도(京都)의 밤 풍경을 인상적으로 사생한 이 시는 1920년대에 발표되었지만 이미 모더니즘적이다. 먼저 ‘페이브멘트’(포장도로)에 주목하자. 흙길을 대신한 포장도로의 등장은 그나마 도시에 잔존한 농촌적 감각을 거의 완벽히 차단함으로써 도시인의 도시성을 완성하였다. 이제 도시의 주민은 농경 사회의 리듬으로부터 해방된 신인류로 재창안되었던 것이다. 그 “페이브멘트”에 “불빛”이 명멸하고 있다. 도시의 밤을 밝히는 전깃불은 전설과 안식이 숨쉬는 농경 사회의 밤을 앗아갔다. 인공의 태양 아래 불면하는 도시의 밤, 이 낯선 풍경에 비가 내린다. 시인은 밤비를 “뱀눈”에 비유하는데, 그 악령적 이미지는 이 새로이 출현한 연옥, 도시의 마성을 그대로 상징하는 터다. 이 연옥의 입구에서 “카ㅇ페 스란스”가 사람들을 꼬인다. 그 카페의 전면 또한 얼마나 기괴한가? 서양 이름을 달고 일본의 도시에 포진한 서양풍 술집에 걸맞게 그 입구에는 이식된 종려 곧 야자나무가 서 있는데, 장명등(長明燈:대문 밖에 세워두고 밤이면 불을 켜는 유리등)마저 삐딱하다. “옴겨다 심은”과 “빗두루 슨”이라는 관형어가 이 풍경의 낯섦을 강력하게 환기하니, 여기에 시인의 현대성에 대한 날카로운 자의식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알다시피 20년대 문학에 등장하는 술집은 기생집이거나 선술집이고 30년대 모더니즘의 대두와 함께 일본인 거류 지역, 명동 일대의 카페들이 우리 문학의 새로운 서식지로 각광받게 된 터이다. 이 시의 조숙한 모더니즘은 바로 시인의 일본 도시 체험에서 솟았다는 점에 유의할 것인데, 동경의 카페 M헌(軒)을 무대로 한 「만세전」 초반의 모던풍과 상통하는 바이다. 하여튼 이 시에 나타난 도시의 밤 풍경에는 자본에 포섭된 도시, 이 새로이 출현한 세계가 과거의 세계와 얼마나 날카롭게 단절된 세상인지에 대한 찌르는 듯한 비애가 배면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 풍경 속에 시인은 홀연 일단의 조선 유학생을 배치한다. 여기서 우선 주목할 점은 그들의 의상이다. 한 사람은 러시아식 루바쉬카를, 또 한 사람은 보헤미안 넥타이를 맸다. 이 이국풍 의상은 무슨 기호(記號)인가? 보헤미안 넥타이는 원래는 체코의 보헤미아에서 유래했지만, 반(反)부르주아적 이단자로서 보헤미안의 함의(含意)가 변동하면서, 특히 상징주의 이후 예술가들이 즐겨 착용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말년 구미에서 귀국한 나가이 가후(永井荷風)가, 보헤미안 타이를 매고 긴자(銀座) 거리를 활보”17)한 이후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인데, 보헤미안 타이와 보헤미안은 긴밀히 호응한다. 1830년대 파리의 몽마르트르에서 탄생, 1910년대까지 유럽 문화의 창조자로서 활약한 보헤미안은 “산업자본주의의 자식이면서도 가장 앞서 시민 사회의 폐절을 유토피아로 그린 근대의 천년왕국론자”였다. 이 일단의 예술가들은 왜 보헤미안을 자처했는가? 이 말에는 이교도라는 비난이 함축되어 있는데, 민간 전승에 의하면, 보헤미아의 선조가 성가족이 애급으로 도피할 때 숙박을 거절, 그 벌로 유랑의 운명에 처해졌다는 것이다.18) 그런데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안들은 결국 유토피아를 꿈꾸는 몽상가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예술에 의한 과학과 종교의 합일을 꿈꾼 보헤미안들은 기독교의 대체 종교, 즉 새로운 예술 종교의 창시자였다. 요컨대 실천의 계기가 결락한 극단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또는 비정치적 사회주의에 머물렀던 것이다.19)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위의 시에 나오는 루바쉬카와 보헤미안 넥타이의 기호를 풀면, 전자는 심미적 정치로서의 사회주의, 후자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 비정되는바, 양자 모두 마르크스주의 밖에서 정치의 미학화를 꿈꾸는 광의의 보헤미안일 터이다.
그리하여 보헤미안들은 새로운 예술 종교의 신전, 카페로 몰려간다. 이 시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카페 안 풍경은 이국적 낯섦과 함께 기묘한 관능을 은밀히 뿜어낸다. 특히 3연은 농염하기 짝이 없다. “鬱金香 아가씨는 이 밤에도/更紗 커틴 밑에서 조시는구료!” 울금향은 튤립이다. ‘튤립’보다 ‘울금향’이 청각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훨씬 농익다. “울금향 아가씨”는 튤립 같은 아가씨 또는 튤립의 의인화, 어느 쪽도 좋을 것이다. “更紗”는 ‘경사’가 아니라 ‘사라사’로 읽어야 할 터인데, ‘오채(五彩)로써 인물, 조수(鳥獸), 화목(花木) 또는 기하학적 무늬를 날염(捺染)한 피륙’으로, 인도 원산(原産)이다. 그러고 보면, 카페 안 역시 “옮겨다 심은” 것들로 가득하다. 말하는 앵무, 울금향 아가씨, 사라사 커튼, 대리석 테이블, 이국종 강아지.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보헤미안이 아니라 식민지 보헤미안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 자기의 땅에서 방축된 떠돌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혈연적 교감! 이것이 식민지 보헤미안과 이 낯선 카페를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그 교감에 높은 문학적 표현을 부여한 명구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탄식한다. “남달리 손이 히여서 슬프구나!” 김팔봉(金八峰)의 시 「백수(白手)의 탄식」20) (1924)과 호응하는 이 구절은 그럼에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팔봉의 시에는 카페 의자에서 혁명을 논하는 식민지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일종의 담론으로 전락한 혁명을 현실로 추동하려는 앨 쓴 노고가 배어 있다면, 지용의 탄식에는 상징주의자의 피로가 엷게 우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팔봉의 시가 리얼리즘의 촉구라면 지용의 시는 모더니즘의 선회다.
다시 소설의 카페 장면으로 돌아가자. 이것은 7장의 서울 장면(병상의 김유정을 찾아 그와의 정사를 꿈꾸지만 이마저 실패하고 결국 동경으로 떠나게 되는 대목)을 건너 8장으로 다시 이어지는데, 정지용의 카페와 사뭇 다르다. 한마디로 카페 안에서는 문득 시현되는 보헤미안 사이의 교감적 분위기가 사라졌다. ‘나’는 일본 최고의 명문고, 일고(一高)의 수재와 마주 앉아 티각태각하는 것이다. 그는 이 장면에서 유학생을 야유한다. “HANDSOME BOY해협 오전 두시의 망또를 둘르고 내 곁에 버티고 앉아서 동치 않기를 한 시간 (以上?)” 이 구절은 정지용의 시 「해협」(1933)을 물고 들어간 것이다. “나의 청춘은 나의 조국!/다음날 항구의 개인 날세여!”에서 보듯이, 정지용의 ‘바다의 모더니즘’이 정오의 사상처럼 비등하는 이 시는 「카ㅇ페 스란스」와 달리 식민지적 조건에 대한 성찰이 비어 있는데, 이상은 이 소설에서 이 시로 야심만만한 조선인 수재를 친다. 그것은 정지용에 대한 야유도 된다는 점에 유의하자.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청년은 정지용의 「말」(1927)을 들어 ‘나’를 야유한다.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밤이면 먼데 달을 보며 잔다”고 맺고 있듯, 떠돌이로 도는 식민지 보헤미안의 자의식을 말〔馬〕에 가탁한 이 시는 「카ㅇ페 스란스」와 통하는 것인데, 청년은 그것을 ‘나’의 촌티로 공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통 불가능은 노바의 웨이트레스 나미꼬와도 또 한 차례 반복된다. Y군과 그녀가 프랑스말로 대화를 나누자 “나는 하도 답답해서 그만 울어버리”고 만다. 나아가 그녀를 “꼴론따이의 누이동생”으로 야유하니, 혁명과 성의 해방을 동시에 밀고 나간 러시아의 여성 혁명가 꼴론따이는 여기서 하나의 기호다. 서구의 보헤미안은 감각을 적대하는 기독교에 대한 반발로 관능의 긍정, 육체 숭배, 모권제적 난교(亂交) 등 고대 오리엔트의 다신교적 체취가 물씬한 법인데,21) ‘나’는 보헤미안적 모권제에 강하게 반발한다.
이 지점이 정지용과 이상의 보헤미안풍이 갈리는 분기점이 아닐 수 없다. 프랑스의 보헤미안은 시대를 따라 세 유형으로 나뉜다. 젊은이다운 호기와 심술로 잠시, “사회에서 추방되어 모멸을 당하는 사람들의 세계로 소풍나갔던” 낭만주의적 보헤미안이 첫째 유형(테오필 고티에)이요, “거리의 맥주집에 본부를 둔 전투적 자연주의 보헤미안”이 둘째 유형(쿠르베)이요, “부르주아 사회뿐만 아니라 전(全) 서구 문명에 결별을 고한 절망자들”, 인상주의 시대의 보헤미안이 셋째 유형(보들레르와 랭보)이다.22) 정지용이 첫째 유형이라면 김팔봉은 둘째 유형이고 이상은 셋째 유형에 가깝다. 다시 말하면 이상은 고통조차도 영롱한 빛깔을 뿜어내는 정지용의 낭만적 보헤미안풍을 해체하는 최후의 보헤미안인 것이다.
마지막 9장은 카페를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귀로 장면이다. 이 장면의 무대는 오전 한시의 신주쿠 역 플랫폼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12월 23일 아침에 유정과 연이로부터 귀국을 종용하는 엽서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이로써 이날 하루 그의 일정이 환해진다. 이날 아침 엽서를 받고 오후에 C양의 방을 방문했던 것이니 9장의 앞머리는 1장과 엇물리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어 C양이 그에게 준 백국(白菊), 옷깃에 꽂은 국화 한 송이가 사라졌음을 발견하고 낮게 신음한다. “어느 장화가 짓밟았을까?” 이 단편의 제목과 조응하는 꽃의 실종은 반자본주의적 이단자로서 생활 대신 예술 종교=미적 근대성을 선택한 그의 모더니즘이 거덜났음을 상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총체적 파탄에 대한 최후의 저항, 자살마저도 실패로 끝나 이제 남은 것은 숨막힐 듯한 권태의 중압 아래 누추한 생존을 지속해야 하는 그의 보헤미안풍 삶 전체의 최후를 표상하는 것이다. 이 진퇴유곡의 위기 속에서 최후의 야유를 던지며 소설은 출구 잃은 끝장에 도달한다.
그러나검정 외투에 조화를 단, 댄서한 사람. 나는 이국종 강아지올시다. 그러면 당신께서는 또 무슨 방석과 걸상의 비밀을 그 농화장(濃化粧) 그늘에 지니고 계시나이까?
사람이비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참 재산 없는 것보다도 더 가난하외다그려! 나를 좀 보시지오?
생화(生化), 살아 있는 꽃의 즉각적 무용성 대신 조화, 가짜 꽃의 견고한 유용성을 선택한 여자 댄서, 이상이 동경에서 유서처럼 남긴 「실화」의 최후를 장식하는 데 선택된 이 기호는 내파적(內破的)일망정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급진적 부정을 감행했던 진정한 모더니즘의 길을 버리고 일종의 교양 속물로 순치되어 천황제 파시즘과 근본적으로 동거하는 가짜 모더니즘의 상징이다. 이상의 ‘가난’은 그래서 더욱 빛난다. 모더니즘의 운명, 그 파탄의 운명을 온몸으로 끝까지 한치의 타협 없이 살아냈던 이상은 식민지적 조건에 긴박된 30년대 한국 모더니즘이 왜 교양 속물의 길에서 이탈해갔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과연 이상 이후 한국의 진정한 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즘 이후’를 치열하게 모색했으니, 해방 직후 조선 문학가 동맹에 합류해간 사정은 이미 주지하는 바이다. 그런데 월북 이후 그들이 부딪친 운명의 험난함을 상기하면 그 ‘이후’ 또한 아득해진다. 지금 우리 문학이 직면한 상황을 곰곰이 살필 때, ‘이후’의 도정, 곧 20세기 한국문학의 실패를 넘어설 그 창조적 길의 모색은 우리에게 던져진 일대의 공안이 아닐 수 없다.